"중화전 동쪽에서 두 번째 칸 앞에 와있습니다. 손을 뻗어 문창살을 만져보세요. 꽃무늬가 느껴지시나요?" 시각장애인들을 인솔한 현장영상해설사가 덕수궁 중화전 앞에서 설명하면 시각장애인들이 문창살을 만져봤다.
시각장애인들이 문창살을 만져보고 창호지 없이 문창살만 있는 이유를 궁금해 하자 해설사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원래 문창살 안쪽으로 창호지가 발라져 있어야 하지만 많은 관람객이 만지면서 창호지가 훼손되기도 해요. 또 통풍을 위해 문창살 3분의 2까지만 창호지를 바르고 아래쪽은 바르지 않았답니다."
덕수궁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문화 현장이다. 시각장애인 궁궐현장영상해설 서비스가 운영되고 있다.
현장영상해설은 시각장애인의 안전한 관람을 위해 영상을 보듯 상세한 묘사, 방향, 거리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제공하고, 촉각 등 다양한 감각을 활용하도록 돕는 시각장애인 전문 안내해설프로그램이다.
1시간 정도 걸리는 비장애인 해설 프로그램과 달리 이 해설프로그램은 상세한 설명이 이뤄지는 만큼 약 3시간이 소요된다. 평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 운영되며 사전예약을 해야 참여할 수 있다.
지난 5월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서울관광재단과 업무협약에 따라 궁궐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현장영상해설탐방 운영을 위해 관람동선 개발, 해설대본 제작. 현장영상해설사 교육을 하고 있다.
지난 7월 경복궁과 창경궁 현장영상해설서비스에 이어 창덕궁과 덕수궁에서도 해당 서비스가 확대됐다. 시각장애인들은 현장영상해설사가 들려주는 상세한 역사 해설과 풍부한 시각적 묘사를 배경삼아 창덕궁 인정전 꽃살무늬 문창살, 희정당의 굴뚝 문양, 덕수궁 정관헌 촉각모형을 직접 만져보며 아름다운 우리 궁궐을 더 입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됐다.
궁능유적본부는 2018년부터 2019년까지 관련 연구 용역을 실시해 2020년부터 궁능 무장애공간 조성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이 사업을 통해 각 궁능에 장애인과 노약자를 위한 편의시설과 모형, 점자 안내판 등 관람안내시설을 정비하고 있다.
2019년 창경궁 통명전 모형부터 2020년 경복궁 초각입체그림카드 안내판, 창경궁 통명전 계단 겸용 이동형 리프트, 덕수궁 정관헌 모형, 석조전 장애인용 승강기,여주 영릉과 영릉 유니버설 안내판, 2021년 경복궁 경회루 모형, 창덕궁 부용정 모형, 종묘 정전 모형, 2022년 구리 동구릉의 촉각 안내판까지 설치됐다.
궁능유적본부 관계자는 27일 "그간 꾸준히 개선된 물리적 관람시설에 비해 장애인을 위한 전문 해설 프로그램 개발 등이 부진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이를 개선하려고 서울관광재단과 업무협약 체결 후 2019년부터 양성했던 현장영상해설사 인력을 활용해 지난 7월부터 시각장애인 전문 프로그램인 궁궐 현장 영상해설 투어를 운영하게 됐다"고 밝혔다.
경복궁과 창경궁코스는 서울관광재단이 2020~2021년 개발해 올해 업데이트를 거쳐 지난 7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덕수궁과 창덕궁 코스는 궁능유적본부가 8월 개발했다.
궁능유적본부는 기존 안내시설 외에도 추가로 개발한 나무모형이나 3D스캔 모형 등을 활용한 촉각 체험을 강화할 계획이다.
추가 활용될 촉각 도구는 경복궁 근정전 모형, 창경궁 대온실과 용마루 지붕 모형, 창덕궁 인정전 모형, 덕수궁 석조전 기둥 모형, 오얏꽃 배지, 정관헌 앞 시향용 커피콩 등이다.
현장영상해설대본 개발 및 투어 운영을 맡은 용역업체 관계자는 촉각 도구 활용에 대해 "시각장애인이 만져봤을 때 가장 재밌게 체험한 곳, 코스별로 중요한 건축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장소를 중점적으로 촉각도구로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이 만져보는걸 굉장히 좋아한다"며 "100번 듣기보다 한번 만져보기로 더 정확하고 빠르게 이해한다"고 설명했다. "건축물 모형이 가장 반응이 좋다"며 "실제 지붕, 구조 등을 느낄 수 있어 반응이 좋다"고 전했다.
현장영상해설사도 "시각장애인에게 손은 또 다른 눈"이라며 "아무리 말로 설명을 잘해도 해설 도구를 직접 만져보고 설명을 들으면 더 실감나게 체감할 수 있고. 해설 도구를 쓰지 않는 경우보다 이해도와 만족도가 2~3배 높다"고 강조했다.
현재 현장영상해설서비스에 대한 시각장애인의 호응은 높은 편이다. 해설사는 "그동안은 시각장애인들이 문화유산 방문 시 1대1 맞춤형으로 문화유산 설명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아무래도 이 프로그램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이 몰랐던 궁궐 내 이야기와 건물구조를 궁금해 하는 경우가 많다"며 "해설사 기대보다 훨씬 더 관심을 보여줄 때도 많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 현장영상해설서비스 확대에 대한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업체 관계자와 해설사 모두 "현재 궁궐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해설 서비스가 박물관 등 다양한 장소에서도 확대됐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은 지난 2020년 8월부터 청각장애인에게 수어해설영상 QR 코드 안내도를 배포하고 수어해설 영상 기기를 대여해주고 있다. 2022년 12월부터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상설전시실에 촉각체험물을 설치 운영하고 있다.
내년 문화재청 예산안에 따르면 3대 중점 투자 분야가 '누구나 누리는 국가유산 복지 실현', '국민이 공감·참여하는 보호체계 도입', '문화 선진국으로서의 글로벌 역할 강화'로 정해졌다.
이 중 '누구나 누리는 국가유산 복지 실현 분야'에서 장애인과 문화 소외계층을 위한 디지털 기술 활용 교육 콘텐츠 제작 및 체험 지원에 27억, 사회적 소외 대상자 초청 활용 프로그램 개발에 10억 원, 궁능 무장애공간 조성에 20억 원이 투입될 계획이다.